「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 그냥 그렇게 그런 것뿐입니다.

<김신회 저, 다산북스>

매년 그렇게 어렵고 어렵다는 출판시장. 당연한 말이지만, 그래도 사람들의 손길이 닿는 베스트셀러는 탄생합니다. 2017년은 어떤 책이 사랑받은 해였을까요?

교보문고 2017년 베스트셀러 분야종합 순위를 살펴보니 언어의 온도, 82년생 김지영, 자존감 수업, 나미야 잡화점의 기적, 나는 나로 살기로 했다 등의 책이 많은 이들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이렇게 죽 나열해 보니, 각기 다른 책들이지만 어느 정도 공통점을 가지고 있는 것 같습니다. 목표를 향한 끊임없는 도전이 아닌, 지금의 나를 돌아보고 힘들었던 나를 위로하는 책들이 아닌가 합니다. 적어도 ‘인생이란 스스로를 채찍질하고 처절한 노력으로 한계를 극복해 성공에 도달하는 것이야!’하는 옛날식 자기개발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을 것이 분명합니다.

2017년을 돌이켜 보면 정말 저 책들 같았습니다. 인생은 한 번뿐이라는 ‘YOLO’가 2017년 유행의 한가운데를 장식했고, 아름다운 자연 속에서 아무것도 하지 않고 멍 때리는 모습이 등장하는 예능 프로그램이 우리의 마음에 치유의 메시지를 보내었습니다. ‘인생 뭐 있어? 그냥 뭐, 어때?’ 하고, 가끔 되뇌기라도 하는 날이면 이상하게도 마음이 참 편한, 그런 마법의 주문들이 반짝이던 지난 2017년.

그리고 그 마법 같은 주문에 저도 홀렸던 것일까요. 서점에 들르면 주로 경영/경제, 자기계발 서적을 찾곤 했던 제 눈에 한 권의 책이 들어왔습니다. 책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입니다.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는 참 재미있는 방식의 책입니다. 저자가 만화책 보노보노를 읽고 느낀 것을 다시 책으로 펴낸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원작 보노보노의 그림과 대사가 주를 이루고, 거기에 저자의 생각이 조금 보태어 있습니다.

제가 이 책을 처음 본 건 작년 여름쯤이었던 것 같습니다. 저는 그냥 이 표지가 파란 책은 뭔가, 하며 별 생각 없이 보았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별 생각 없이 집어 들어 구입을 하게 되었지요. 제가 이 책을 구매하게 한 것은 표지 외에도 다른 한 구절 때문이었는데, 바로 살면서 겪는 곤란함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보노보노, 살아있는 한 곤란하게 돼 있어.
살아있는 한 무조건 곤란해.
곤란하지 않게 사는 방법 따윈 결코 없어.
그리고 곤란한 일은 결국 끝나게 돼 있어.
어때?
이제 좀 안심하고 곤란해할 수 있겠지?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2017, 다산북스, p15

 

인생이 곤란하지 않을 수 없고, 곤란은 어쨌든 끝나니, 쓸데없이 곤란해하지마 라고 일말의 곤란함 없이 정리해준 표현에 뭐라 말할 수 없는 속 시원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그냥’, 사게 된 것입니다. 정말 ‘그냥’. 그리고 이런 ‘그냥’들이 모여, 연말에 그냥, 베스트셀러가 되었을 것입니다.

 

봄은 저쪽에서 천천히 천천히 오는 거구나.
달팽이는 걷는 게 늦구나.
그럼 아주 오래 전부터 계속
내가 있는 여기까지 걸어온 거구나.
역시, 천천히 오는 건 굉장해.

「보노보노처럼 살다니 다행이야」, 2017, 다산북스, p165

 

제가 ‘그냥’ 책을 구매하게 되었던 것처럼, 책에 대해 이런 저런 말들을 늘어놓는 것은 아무런 필요가 없을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우연히 들른 서점에서 우연히 만나, 우연히 그냥 한 번 넘겨보는 것이 이 책을 이해하는 가장 좋은 방법일 것 같습니다.

“보노보노와 친구들은 그들의 삶을 통해 무엇을 이야기하고 있을까. 우리에게 어떤 메시지를 전하고 싶은 걸까. 책이 완성될 즈음에야 알게 되었다. 그들의 삶의 중심에는 솔직함이 있었다.”

저자의 의견에 저도 동의합니다. 그냥 그렇게 그런 것뿐입니다.

 

 

「바깥은 여름」,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하다

<김애란 저 / 문학동네>

이 책의 저자 김애란 작가는 소설 좀 읽는다는 주변 분들로부터 숱한 추천을 받았던 작가입니다. 또 대표 작품인 ‘두근두근 내 인생’, ‘비행운’의 유명세를 보며 궁금증을 가질 수밖에 없었지요.

그러던 중 작년 겨울 이 책, ‘바깥은 여름’을 집어 들게 되었습니다. 책 제목의 ‘여름’이라는 단어에 추운 계절과 어울릴까 고민이 되었지만, 책 뒷면의 문구가 저의 마음을 움직였습니다.

‘볼 안에선 하얀 눈이 흩날리는데, 구 바깥은 온통 여름일 누군가의 시차를 상상했다.’

저는 이 문구를 읽고 소설의 의미에 대해 다시금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우리는 사람의 겉모습만을 보고 그의 내면까지 판단하곤 합니다. 또, 뉴스에는 사건의 단편만을 얘기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반면 소설을 읽을 때 우리는 인물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고, 사건을 구체적으로 살피게 됩니다. 이렇게 우리는 소설을 통해 간접적으로나마 타인을 더 가까이 접해볼 수 있죠.

이 책에는 7편의 단편 소설이 실려 있습니다. 모두 우리 곁의 누군가가 겪었을 법한 일상의 이야기들입니다. 10년을 사귀었지만, 현실적인 문제로 이별을 고민하는 커플 이야기, 할머니와 단둘이 살며 유기견과 우정을 쌓는 어린이 이야기 등 어쩌면 기사나 다큐멘터리에서 스치듯 본 이야기들 같기도 합니다. 그만큼 강한 흡입력으로 읽는 내내 인물들과 함께 웃고 함께 울게 되는 이야기들이었습니다.

그럼 이 중 인상 깊었던 몇 부분을 소개해 보겠습니다.

 

무너진 사람들의 이야기, ‘입동’

이 단편에는 집안일을 도와주러 온 시어머니가 실수로 복분자 액을 사방에 튀기자 며느리인 주인공이 ‘아이씨-‘하고 짜증을 내는 장면이 있습니다. 저는 이 부분을 읽으며 어떻게 어르신에게 이런 말을 할 수 있을까 놀랐지만, 다음 내용을 읽어갈수록 인물을 이해하게 되었습니다.

이야기의 주인공은 후진하던 어린이집 차량에 의한 사고로 다섯 살 난 아들을 잃은 사람입니다. 위 장면에서 등장하는 복분자 액은 아이를 죽게 한 어린이집에서 착오로 보낸 것이었지요. 그런 복분자 액이 사방에 튀었으니 얼마나 수많은 감정이 오르내렸을까요? 그녀를 두둔하고 싶지는 않지만, 그 언행에도 개연성이 있었던 것입니다.

주인공을 점점 이해하며 남의 행동을 기본적인 도덕 소양만으로 단정 짓는 것은 어리석은 행동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옳고 그름을 구분하는 것만큼 공감의 힘도 중요하지 않을까요?

 

상실의 아픔을 치유하는 이야기, 어디로 가고 싶으신가요

스코틀랜드에 사는 사촌 언니로부터 한 달 정도 집을 비우니 와서 지내볼 것을 제안받은 주인공은 영국행 비행기에 몸을 싣습니다. 사촌 언니의 제안은 사고로 남편을 잃은 주인공이 낯선 곳에서 마음을 추스르길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었지요. 주인공은 낯선 땅에서 남편의 습관을 곱씹어 보거나, 사람으로부터 위안을 찾기도 하지만 마음의 상처가 치유되기는커녕 원인을 알 수 없는 두드러기만 얻고 맙니다.

상실의 아픔은 사람에 따라 두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속이 뒤틀리는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합니다. 하루에도 많은 사람이 명을 달리하고 주인공과 같은 사람들도 여럿 생겨납니다. 주인공을 통해 이런 사람들의 마음을 조금이나마 엿보고 나니, 그들을 대할 때 어쭙잖은 위로와 조언을 하기보다는 경청과 공감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작가는 책을 집필한 후 본인의 글을 돌아보며 아래와 같이 글을 맺습니다.

“내가 이름 붙인 이들이 줄곧 바라보는 곳이 궁금해 나도 그들 쪽을 향해 고개 돌린다.”

소설 속에서 제가 만난 인물들은 좋지 않은 상황에서도 희망을 품고 있었습니다. 그들이 바라보는 곳이란 바로 희망이 있는 어딘가가 아닐까요? 그렇기에 앞으로 마음이 시릴 때마다 사람 냄새가 나는 이 책을 찾게 될 것 같습니다.

 

 

「사랑하지 말자」 : 사랑이 변명이 된 세상에게

<도올 김용옥 저 / 통나무출판사>

참 기괴한 제목이라고 생각했다. ‘사랑’의 가치에 맞설 수 있는 것이 이 세상에 존재한단 말인가?
종교, 문화, 정치, 경제를 망라하여 ‘사랑’이라는 단어는 절대적 명제가 되어버렸다. 물론 너무 쉽게 쓰이고 온갖 문제의 막연한 해결책으로 제시된다는 부작용도 있다.

세계를 지배하는 수많은 종교에 의해 사랑은 가끔 ‘이기적’으로, 혹은 변명에 불과하게 발현되고 있는 시대말적 상황에 분노의 독을 내뿜는 한마디, ‘사랑하지 말자’.

그러나 도무지 ‘사랑’, 그 말고 대안이 있는가? 혼탁한 세상을 정화시켜줄 것 같은 마법의 말이 과연 또 무엇이냔 말이다. 이에 대해 저자는 한 가지 예를 통해 해결책을 밝히고 있다.

‘날카로운 것에 찔리면 피가 나고 시간이 좀 흐르면 피딱지가 얹히게 되는 데, 이는 피의 철 성분 때문이다. 이 피딱지가 떨어져 나가도 이는 내 몸의 일부일 수 밖에 없다. 철이 녹이 슬면 붉은 색 철가루가 날리는 박리현상이 일어 나는 데 이 철가루의 성분과 피딱지의 성분이 똑같다. 자연계의 모든 유기체, 무기체가 결국 한몸인 것이니 자연에 대한 <측은지심> 이야 말로 공공의 선을 지켜낼 수 있는 근본 자세라 할 수 있다’

그 외 관심을 갖게 한 주제는 우주에 대한 것이다. 저자는 우리 인식의 경계를 뛰어 넘는 신의 존재, 그리고 우주가 빅뱅으로부터 무한히 팽창하고 있다는 우주기원설 등을 동시에 부정한다. 신도 자연도 우리 인식의 틀 안에서 변화해 왔고, 공포를 무기로 마케팅을 하는 불변의 존재 보다는 실재하는 종교와 과학의 순기능에 집중하여야 한다고 주장한다.

우주, 종교, 대선, 청춘, 음식 등 우리 삶의 큰 줄기를 이루는 무거운 주제에 대해 저자는 방대한 지식과 날카로운 논리로 통념을 뒤집고자 노력하고 있다.

사변적이고 유한한 ‘사랑’ 보다는 내일의 우리네 삶을 조금이나마 변화시킬 수 있는 각자의 소소한 ‘혁명’이 시대의 청춘에게 더 어울리며 가치 있다고 주장하는 저자의 논지에 일견 동의한다. 하지만 이를 현실 세계에 적용하기에는 어떤 벽이 느껴지는 것이 사실이다.

유교 중심의 전통 가치와 자본주의의 결합은 자기모순적이고 왜곡된 형태로 일그러진 대한민국의 얼굴을 만들어냈다. 이에 일침을 가하는 도올의 사상이 동서양의 사상을 결합한 하이브리드형 사상이라는 점이 퍽 재미있다.

책 표지와 편집이 다소 촌스럽게 느껴질 수 있다. 하지만 충격적이고 날카로운 글귀에 집중은 잘 되는 편이니 졸음을 걱정할 필요는 없다.

 

 

「Deep Change」, 희망을 담은 경고

국내에서는 20년 전 발간되었던 책 한 권을 살펴보려 합니다. 「Deep Change or Slow Death: 기업과 개인의 혁명적 생존전략 23가지」입니다.

20년 전이면 1998년입니다. 우리나라가 외환위기로 IMF(국제통화기금) 구제금융 신청을 발표한 것이 1997년이었으니, 이 책은 그 즈음에 맞춰 나온 책이라 볼 수 있습니다. 저자는 미국 경제학 교수 로버트.E.퀸이며, 원서가 발간된 해는 1996년입니다.

「Deep Change or Slow Death」. 제목이 의미심장합니다. ‘변하지 못하면 결국 서서히 죽음의 길로 갈 것이다’로 해석할 수 있을까요? 외환위기에 신음하던 시점에 발간되었으니, 이 제목만으로도 참 많은 국내 독자의 공감을 얻을 수 있었을 것입니다. 당시에 우리는, 미처 변하지 못했던 기업과 개인이 눈앞에서 소멸하는 장면을 실제로 목격하고 있었습니다.

굳이 20년 전 책을 찾아보게 된 것은, 20년이 지난 최근에 또다시 ‘Deep Change’라는 말이 화두로 던져졌기 때문입니다. ‘혁신’이라는 단어가 너무도 흔히 사용되며 힘을 잃었고, 우리에게는 ‘진짜 혁신’을 표현할 수 있는 단어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이룰 수 있는 ‘진정한 혁신’은 무엇인지, 그리고 그 ‘진정한 혁신’을 창출하기 위해서는 얼마나 더 깊은 변화가 필요한지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는 것은 자연스런 일이 아니었을까 합니다.

 

유효한 경고

‘Deep Change or Slow Death’라는 20년 전의 이야기. 급변하는 사회 속에서 우리는 그 경고에서 생생한 위기감을 느끼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의 내용이 정말 ‘변하지 않으면 서서히 죽을 것이다’는 내용만을 담고 있는 것일까요?

여러 외국 서적이 그러하듯, 책의 원제는 국내 발간 버전과 다릅니다. ‘Deep Change : Discovering the Leader Within’이 원서의 제목입니다. ‘Slow Death’라는 위협의 말, 그리고 족집게 해설지같은 ‘생존전략 23가지’ 등의 표현은 없습니다. 오히려 ‘조직의 깊은 변화는 개인, 즉 진정한 리더를 발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는 희망적 메시지를 함축하고 있습니다.

책은 신념을 갖고 변화를 추진하는 한 개인, 그리고 그가 조직에 미치는 무한한 영향과 가능성에 대해 말합니다. 시대에 구애 받지 않는, 인간과 조직을 위한 근원적 변화란 무엇인지. 그리고 그 근원적 변화를 위해 또다시 근본적으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고민합니다.

“이 책은 근원적 변화의 프로세스(process of deep change)와 주체적 리더십(internally driven leadership)의 개발에 대한 탐구가 될 것”이라는 게 저자의 말입니다. 이 두 가지가 책의 핵심적 줄기이며, 위기감을 강조해 변화를 이끌어내기보다는 Deep Change를 가능케 하는 근본 동력에 대해 고민하도록 화두를 던집니다.

 

진심 어린 경고

‘Deep Change or Slow Death’는 개인과 조직이 살아남기 위한 방법을 제시하는 경영서적이지만, 인간적 울림을 보여주기도 합니다. 인간 내면에 대한 고찰을 Deep Change를 달성하기 위한 중요한 부분의 하나로 제시하기 때문입니다.

불확실성에 대응하고 스트레스와 불안 속에서도
자기 역할을 다할 수 있는 역량(capacity)은 자신감(self-confidence)에 달려있다.
자신감의 정도는 다시 스스로 도덕적 성실성(integrity)을 얼마나 갖추어나가는가에 달려있다.
우리는 모두 기술적인 수행능력(competence)과 정치적 역학에 영향을 받기는 하지만,
그보다 더 깊게 영향을 받는 것은 바로 도덕적 힘이다.
모든 힘의 궁극적 원천은 도덕적 힘이다(Moral power is the ultimate source of power).
– 본문 14p 내용 중 발췌-

이외에도 ‘불확실한 세계를 벌거벗은 채 여행하는 것’, ‘신념을 갖고 길을 잃기’ 등 흥미로운 분석과 표현이 중간중간에 있습니다. 저자는 책을 머리뿐 아니라 가슴으로 쓰겠다는 다짐 아래 이 책을 썼다고 고백합니다. 안전한 방패막이를 버리고 학계로부터 비난을 받을 수도 있는 위험한 선택을 시도한 것입니다.

20년 전으로부터 도착한 이야기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분명하지 않나 싶습니다. 위협과 절망의 경고가 아닌, 가능성과 희망의 메시지입니다.

 

<참고 자료>
로버트.E.퀸, 1998년 4월, 『Deep Change or Slow Death : 기업과 개인의 혁명적 생존전략 23가지』, 도서출판 늘봄

 

 

「그리스인 조르바」, 나를 부수자 내가 되었다

1. 소설 내 그리스의 시대적 배경은 어떠한가?

그리스인은 고대 때부터 현 영토인 발칸반도에 자리를 잡았으며, 터키는 중세 초기에 소아시아에 자리 잡았다. 고대에는 현재 터키의 영역인 소아시아에도 그리스 문명이 번성하였으며, 그리스인이 주요 구성원이었던 동로마제국은 중세까지 건재하였다. 하지만 15세기 오스만 투르크 제국에 의해 동로마 수도인 콘스탄티노플이 점령되며 동로마제국은 멸망했다. 그리스의 발칸 반도도 오스만 제국의 지배를 받게 된다.

18세기에 이르러 오스만 제국이 흔들리면서 그리스는 독립에 대한 의지를 품는다. 1822년 그리스는 오스만 제국에 대한 독립을 선포하였고 이후 ‘그리스 독립전쟁’이 일어났다. 영국, 프랑스 등 오스만 제국을 약화시키고자 하는 주요 강대국들의 협력에 의해 1829년 그리스는 독립을 이룬다.

니콜라스 카잔차카스(Nikos Kazantzakis, 1883~1957)는 크레타섬 출생으로 터키의 지배, 기독교 박해 및 독립전쟁의 시대상을 문학작품에 반영하고자 노력했으며 그리스 민족시인 호메로스와 독일의 철학자 니체의 영향을 받았다. 그는 그리스의 민족 시인이자 작가이다. 19세기 민족주의, 정복 주의가 활개를 칠 때, 소국 그리스의 풍전등화를 지켜보면서 개인의 삶의 의미를 문학작품을 통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리스인 조르바>의 핵심내용은 <거룩하게되기>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 육체와 영혼, 물질과 정신의 임계 너머에서 일어나는 성화(聖化)를 의미한다.

니콜라스 카잔차카스의 중국, 일본 등을 여행한 기행문에서는 근대화 당시 우리가 몰랐던 변화들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다. 중세에서 근대로 넘어가는 19세기는 우리가 4차산업으로 느끼는 감정보다 더욱 생경하였을 것이며 진보/보수 간의 문화/사회적 의견대립도 심했을 것이다.

고려시대 정도전을 추종하던 세력들은 급진적 좌파로 분류되었지만, 후대 조선시대에는 훈구파라는 악명 높은 보수단체로 분류되듯이 영원히 신선한 것은 없다.

소설 곳곳에서 보이는 전통적 가치와 근대적 가치의 대립은 광산개발을 하는 작은 도시에서도 엿볼 수 있다. 일확천금을 가져다줄 수도 있다는 소식에 모든 동네 주민들은 조르바와 주인공을 칭송한다. 교회의 전통, 남녀 간의 정절 등의 가치가 살아있는 동네지만 자본주의의 달콤한 향기에 조금씩 균열이 가는 모습을 보인다.

남유럽의 자본주의는 인간미가 있다. 칼같이 관리하지 않기에 작금의 경제위기를 겪고 있는 것이 아닌가? 긴 역사의 페이지에선 이것도 하나의 해프닝에 지나지 않겠지만 인생이란 늘 굴곡진 것이라는 대명제를 아마도 남유럽 사람들은 북유럽 사람들보다 수긍하고 받아들이는 것 같다.

 

2. 혼란의 시대에서 개인은 어떤 선택을 해야 하는가?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인가? 아니면 개인의 목숨을 보전할 것인가?

‘대가리에 잉크를 뒤집어쓴 채 종이를 씹으면서 얼마나 더 있겠다는 것인가? 왜 나와 함께 가지 않나? 저 멀리 코카서스에, 위험에 처한 수천만 동포가 있는데? 함께 가서 구해주자’ <작품 중>

주인공의 친구는 그리스 독립을 위한 전쟁에 참여하고자 한다. 하지만 끝내 주인공은 함께 하지 못하고 친구에게 타박을 받는다. 친구와의 대화에서 엿볼 수 있듯이 행동하지 않는 지성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는 늘 유효하다.

한반도 전쟁위기가 고조되고 있다. 과연 전쟁이 난다면 나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솔직히 참전하고 싶지 않다. 국가를 위한 희생이 내 삶에 어떤 가치를 줄지 확신이 들지 않는다.

전쟁에 참전 중인 친구를 떠나보내며 슬퍼하는 주인공은 나와 비슷한 고민에 빠진다. 그리고 참전하지 않는다. 이 대목에서 주인공의 솔직한 선택이 마음에 들었다. 개인은 한없이 작고 나약한 존재다. 시대를 압도하는 이데올로기가 출현하지 않는 이상, 알량한 의협심은 곧 후회를 가져올 뿐이다.

국가, 권력 간의 전쟁은 민초들의 피를 원한다. 그들을 사상적으로 무장시키고 조국에 충성할 것을 요구한다. 태초에 가족을 위한 희생, 부족을 위한 희생은 좀 더 순수했다. 내 눈앞에 보이는 부모, 자식들과 이웃들을 지키기 위한 것이다. 그러나 국가 차원의 권력은 흐릿하다. 국가의 정체란 무엇인가? 통치자인가? 아니면 법률과 같은 시스템인가? 그저 보이지 않는 곳에서 나를 통치하고 보호해준다 외치는 허상일 뿐인가? 미국의 군대라면 좀 더 이해가 잘 된다. 희생자에 대한 예우, 현역 군인들에 대한 처우 등이 상대적으로 좋은 것으로 알고 있다. 외국인은 미군에 복무하고 시민권을 얻고 각종 경제적 혜택을 받기도 한다.

참전과 영웅적 행동들은 선, 그 자체라기보다는 명예, 권력에 대한 욕망의 간접적 발현이다.

 

3. 자유인, 이 시대의 자유란 무엇인가?

6시에 기상해서 운동한다. 샤워와 간단한 아침 식사를 하고 9시까지 출근을 한다. 7시에 퇴근하여 집에 와서 가족들과 담소를 나누며 저녁 식사를 하고 다시 잠자리에 든다.

20대 초엔 대학 생활을 하고 군대에 가며 20대 후반에 취업한다. 30대 초반에 결혼해서 30대 중반엔 아이를 낳고 40대 초반엔 아이를 학교에 보내고 아파트를 산다. 50대에 회사를 은퇴하고 퇴직금을 알뜰히 모아 자식들 대학 보내고 결혼을 시킨다.

전형적이고 안정적으로 보이는 중산층의 삶이다. 하지만 답답하고 새로울 것 없는 인생일지도 모르겠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자유’를 새삼스럽게 논한다는 것이 어쩌면 유별난 일일 수도 있겠다. 하지만 좀 더 깊은 의미의 ‘자유’를 말해보자. 그것은 사회가 정해놓은 표준편차를 벗어날 수 있는 선택권이 주어지는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스티브 잡스, 저커버그 같은 괴짜들이 성공하는 시대라고 한다. 하지만 유교적 전통이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는 우리나라에선 공허한 구호만 있을 뿐, 튀는 사람이나 사회 규범을 따르지 않는 사람이 성공할 수 있는 확률은 지극히 낮다.

‘무슨 뜻이냐 하면, 임금이니, 민족주의니, 국민투표니, 국회의원이니 해봐야 다 그게 그거니까 하는 소리요’ <작품 중>

조르바는 시스템이 자유에 필연적으로 방해가 됨을 직감하고 있었다. 시스템은 민초의 삶에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오히려 권력자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사용되어 왔다. ‘복지국가’라는 개념은 인류에게 생소하다. 20세기에 들어와 북유럽에서부터 퍼져나온 것이지만 상당히 이례적인 현상이다. 여전히 시스템은 권력을 중심으로 돌아가고 범인(凡人)들을 제어한다.

조르바는 야성적 충동에 의해 움직이는 사람이다. 주린 배를 채우기 위해, 이성의 호감을 얻기 위해, 그리고 경제적 지위를 향상시키 위해 항상 최선을 다한다. 사실은 우리 역시 마찬가지이지만, 저마다의 비전과 명분을 앞세워 속내를 감춘다.

조르바는 본인이 원하는 것을 거침없이 입으로 내뱉는다. 언어로 표현하기 힘든 형이상학적인 생각들에 대해서는 몸짓으로 노래로 배설하듯이 모든 것을 쏟아낸다. 모든 것을 쏟아내기에, 그리고 원하는 것을 위해 최선을 다했기에 여한 없는 삶을 살았을 것이다. 조르바에게 자살이란 없다. 마치 동물이 자살하지 않는 것처럼.

자살은 사회적 속박에 대한 극단적 회피이다. 절제의 미덕보다는 배설의 자유를 조금은 허락할 수 있는 유연한 사회가 되길 바란다.

 

4. 지식인의 한계, 필드에서 몸으로 체득하는 경험이 더 가치있는 것일까?

‘내게는 지금 리비아에 면한 크레타 해안에 폐광이 된 갈탄광 한 자리를 빌려 둔 게 있었다. 나는 책벌레 족속들과는 거리가 먼 노동자, 농부 같은 단순한 사람들과 새 생활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작품 중>

친구의 참전을 안타까운 마음으로 떠나보내고 주인공은 책벌레 콤플렉스에서 벗어나고자 몸부림친다. 평안한 삶을 뒤로하고 사업가로서의 리스크를 안고 일종의 모험을 떠나게 된 것이다. 하지만 몸에 맞지 않는 옷은 불편한 법. 주인공은 기존 삶의 패턴과 가치관은 새롭게 만나는 사람들과 자유로운 영혼 조르바가 보여주는 가치관과 대립한다. 주인공은 이 대립으로 지속적인 심적 갈등을 겪는다.

4년제 대학을 나온 직장인들은 여전히 열심히 공부한다. 제2외국어, IT, 재무, MBA 학위 등 첨단의 지식노동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몸값을 높이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한다. 자본주의 사회의 먹이사슬 내 정점에 있는 사람들은 어쩌면 이런 지식노동자를 잘 부릴 수 있는 경제적 포식자, 어쩌면 필드에서 몸으로 부딪혀 익혀낸 사람일 수도 있겠다. 크던, 작던 기업체를 운영하는 오너는 리스크를 온전히 스스로 감내한다. 투자의 결정, 직원의 채용과 해고, 자원의 배치 등은 이론만으로 수행할 수 있는 것들이 아니다. 여러 번의 시행착오를 겪고 현장에서 긴 시간 숙성되며 쌓은 감각은 암묵지(暗默知, 학습과 경험을 통해 개인에게 체화되어 있지만,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지식)의 형태로 경영자의 손과 발이 되어 움직인다.

현장의 지식과 학문적 지식의 조화는 성장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 학문의 범위를 좁혀 실무에 적용하고 현장의 경험들을 오롯이 정리하여 구조화하는 작업들이 꾸준히 이루어질 때, 진정한 고수가 될 수 있다.

조르바와 주인공은 필드 경험과 학문적 지식의 극단에 서 있다. 주인공에게 책이란 일종의 도피처 같은 것이다. 책에는 모든 선인의 경험, 실패, 그리고 삶의 지혜가 담겨 있다. 하지만 개인의 삶에 녹아 들어가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조르바는 책 따위 모두 불살라 버리라고 외친다. 책을 쓰는 행위란 언제나 진실보다는 과장/미화가 따라붙게 되고, 그 과정에서 오해와 왜곡이 있을 거라는 짐작에서 나온 외침일 것이다.

책을 읽는 것보다는 하나의 의식적 행동을 하는 것이 더 많은 에너지를 소모한다. 하지만 책보다 피드백은 빠를 수 있다. 시행착오가 주는 몸과 마음의 상처를 감내할 수만 있다면 조르바처럼 몸뚱이 하나로 세상에 맞서는 것도 나쁘지 않다.

수십 년을 문자를 신봉하며 살아온 내겐 참으로 어려운 과제이다.

 

5. 조르바는 선인인가, 악인인가?

조르바는 신의가 없는 사람이다. 주인공을 배신하고 사업체를 말아먹고 도망친다. 하지만 악인이라 수는 없다. 그는 사람을 해치거나 겁박하거나 괴롭히지는 않았다.

책은 주인공을 기득권 세력으로, 조르바를 서민 혹은 피해자라고 설정한 것처럼 보인다. 그렇기에 이 정도의 일탈은 사회가 보듬어 줄 것이라 자위한다.

경쟁에서 승리한 자들에게 모든 것을 다 갖게 할 수는 없다. 조르바의 배신은 일종의 세금이다. 1급수의 물이 늘 좋은 것은 아니듯, 적당히 혼탁한 사회가 인간미 있다. 이는 그리스와 같은 남유럽 사회에 대한 이미지와 겹친다. 독일과 같은 북유럽 사회에서 이런 인간상이 긍정적으로 비추어지기는 힘들 것이다.

나쁘지만 밉지 않은 조르바 덕분에 나는 꽤 괜찮은 사람이고, 신의도 있으며, 젠틀한 삶을 영위하고 있다고 비교 우위를 통해 스스로를 자위할 수 있게 된다.

‘종신형을 살기 위해 어두운 감옥으로 들어가는 느낌이었다. 악마와 지옥의 불길과 피투성이 젖가슴을 한 매춘부 아니면 뿔이 달린 지옥의 괴물 그림이 벽면을 메우고 있었다. 사람들에게 겁을 주자는 교회의 갈망이 그대로 투영된 묵시록적 협박, 사람을 천국으로 데려가는 것은 사랑이 아니라 두려움일 것이라는 인상을 받았다.’ <아토스산 순례기 >

작가는 당대의 보편적 ‘선’에 대해 치열하게 고민했다. 구원의 길을 깨닫기 위해 수도승들이 기거하는 아토스산에 올라 묻고 토론했다. 하지만 고통과 억압으로 얼룩진 수도승들의 삶을 보면서 과연 우리가 ‘선’이라고 부르는 것들이 얼마나 인간을 힘들게 하는지, 행복의 감각을 제어하는지 알게 된다.

무릇 이런 시도는 불경한 것이고 패륜적인 것으로 치부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모든 진보의 시작은 사소한 반항과 의문에서 출발한다. 이런 측면에서 작가는 여행과 사색을 통해 지속적으로 지적인 사회적 반항을 시도한다. 종교에 대해, 피지배자인 터키에 대해, 구시대적 관습에 대해.

저자는 조르바를 통해 ‘선’의 개념에 반기를 들지만, 그 역시도 인간의 나약함을 억제하고 삶의 의지를 훈련시키는 것이 종교나 사회적 교육 시스템이라는 것을 부인하지 못한다. 태어날 때부터 진보주의자는 없다. 책을 읽으며, 학교를 다니며, 기득권자들과 교류하면서 정반합의 사상이 형성되는 것이다.

진보와 보수의 조화, 절대로 어울리기 힘들 것 같은 두 가치의 적절한 조합을 작가는 꿈꾸고 있다. 악이라는 개념이 있기에 선의 개념이 있을 수 있고, 또 돋보이는 것처럼, 특정한 이데올로기가 인간의 가치를 규정하지 않는, 좀 더 자비로운 세상. 관용이 넘치는 사회를 만들고자 했던 작가의 의지를 읽는 시간이었다.